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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땀 흘리는 소설

어비, 김혜진

 

언젠가 화장실 세면대에서 무언가를 꼼꼼하게 씻고 있었는데 그게 개집 앞에 놓인 물그릇이라는 건 나중에 알았다. 뭐 저런 것까지 신경 쓰나 싶었지만 어쨌든 아무도 모르는 사이 어비의 성실함과 부지런함은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작은 개집에까지 닿아 있었다.

 

하루는 길고 일주일은 금방 지났다.

 

기도, 김애란

 

신림- 하면 푸른 숲이 떠오른다. 나무가 많은 숲 그리고 젊은 숲, 그 숲의 나무들은 모두 지하철 2호선을 표시하는 연녹색을 띠고 있다. 보통의 나뭇잎은 그보다 짙지만 어쩐지 신림의 나무들만은 꼭 그래야 할 것 같다. 신림, 하고 소리 내면, 먼 곳의 잎사귀들이 우수수 흔들리며 수풀 림, 수풀 림하고 울어대는 것 같다. 신림, 하고 발음할 때 내 혀는 파랗게 물든다. 구파발이라 읊조리면 내 가슴 어딘가에 꽂힌 붉은 깃발이 마구 펄럭이는 것처럼. 그것은 진짜 신림 진짜 구파발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베개를 안고 한강을 건넌다. 서울대입구역까지는 열차를 두 번 갈아타야 한다. 지하철 의자 한가운데 앉아 발꿈치를 세운다. 베개는 커다란 비닐봉지 안에 들어 있다. 그것은 작은 덜컹임 한 번에도 예민하고 시끄럽게 바스락거린다. 그 소리가 하도 얇아 나는 베개를 더욱 꼭 끌어안는다. 강 너머, 빌딩 숲이 보인다. 그것은 투명한 살갗 위로 온몸에 볕을 받고 있다. 뭉게구름 사이로 언뜻 비치는 서울 한 시의 표정. 서울 한 시의 반짝임. 세계는 창이 너무 많아 사람들이 어둡다.

 

숨을 고른다. 전송 완료를 기다리는 순간에는 이상한 기분이 든다. 제 주소를 찾아가는 활자의 이동이 어떻게 가능한지 감이 오지 않는다. 하루에도 수천만 명이 수천만 개의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는데. 어째서 이 사람의 미안하다와 저 사람의 괜찮다는 부딪치지 않고 온전히 상대방의 단말기로 미끄러져 갈 수 있는 걸까. 일산화탄소와 질소, 배기가스의 부피만큼 많은 메시지들이 공기 속을 부유하고. 우리는 메시지에 둘러싸인 채 메시지를 마시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언니에게는 아직 답신이 없다.

 

나는 신림하고 중얼거린다. 흔들리는 푸른 잎 사이로 풍경 하나가 보일 듯 말 듯 어른거린다.

 

어디까지를 묻다, 구병모

 

신수의 힘도 빌리지 않고 최소한 어느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행하거나 도약했다는 거잖아요? 단지 주인공이 뒤늦게 정신 차리고 그전까지 직진 일변도이던 길의 방향을 꺾었다는 사실만으로? 그런데 어디까지 가야 그 길이 내가 가려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사람은 알게 되는 거죠? 어디까지 갔을 때 사람은 자신의 심연에서 가장 단순하며 온전한 것 하나를 발견하고 비로소 되돌아올 여지를 찾을 수 있거나, 아니면 되돌아올 길이 없어 그대로 다리 아래로 몸을 던져 버리게 되는 걸까요?

 

코끼리, 김재영

 

우리는 슬레이트 지붕 위로 무섭게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창문 반대편에 걸린 달력 사진을 바라보는 걸로 지루한 여름을 견뎠다. 투명하고 생생한 햇빛, 푸른 티크나무 숲, 눈 덮인 안나푸르나, 잔잔하게 물결치는 페와호, 그리고 사탕수수를 빨아 먹으며 웃고 있는 아이들.

 

염색 공장에서 나오는 새빨간 물이 도랑을 붉게 물들이며 흘러간다.

 

- p

 

목젖 아래 뭐가 사나 봐. 뭔가가 계속 기어 나오네. 이를테면 해파리 같은 거?’

이렇게 말하면 아내는 뭐라고 할까. 가장 최근에 태평양을 건너간 말은 보너스를 입금했다는 말이었고, 그 전에 나눈 말은 환율 때문에 득을 보았다는 말이었다. 태평양을 건너는 말은 이를테면 그 정도의 권위가 있어야 했다. 뉴저지의 청중들에게 그는 캡슐이니 해파리니 하는 사건을 들려줄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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