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으면서 특히 좋았던 부분, 혹은 내가 일상생활에서 스치듯 느꼈지만 그걸 글로 표현할 방법을 몰라 헤메고 있던 표현을 명쾌하게 풀어준 부분... 등을 짧게 발췌해 기록하는 글
29p- 요나는 지하철 노선도를 쳐다보았다. 곧 개통될 노선들이 점. 점. 점. 숨을 옥죄어 왔다. 이미 달리고 있는 노선들이 점점 더 길어졌다. 요나는 지하철 끝을 불로 지지고 싶었다. 헝겊의 끝을 불로 지지듯이. 더 이상 올이 풀리지 않게.
30p-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꽃은 진 지 오래고, 그 자리에서 검은 버찌 열매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검은 버찌들의 투신으로 보도블록은 피멍이 들어있었다. 요나는 결국 사표를 냈다.
44p- 젓갈 냄새가 어둠처럼 포복하며 다가올 무렵, 그들은 목적지에 당도했다. 요나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아마도 이 냄새는 느억맘이겠지. 책에서 활자로만 읽었던 냄새였다. 생선을 발효한, 젓갈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는 느억맘은 재료에 조금씩 변형을 가하면서 이 일대의 식탁을 점령했다. 무이는 그런 느억맘에 기대어서 겨우 살아가던 곳이었다. (중략) 어쨌거나 요나는 이 비릇한 내음이 싫지 않았다. 누군가의 집, 누군가의 마을에 다다를 때 후각이 자극을 받는 순간은 처음 한순간뿐이기 때문이다. 다시 낯설어지지 않는 한, 처음 접한 그 순간의 후각적 자극을 매 순간 인식하기란 어렵다.
46p- 오랜만의 휴식이었다. 어쩌면 생각보다 괜찮은 여행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요나는 생각했다. 여행이 끝난 후에 이곳을 그리워할 감정을 미리 느끼는 자신이 낯설었다. 사람들이 여행에서 기대하는 것들, 그러니까 일상의 공백을 통해 가벼워지는 무게들과 예기치 않은 변화들, 그런 가능성에 대해 조금씩 생각하는 동안, 타지의 첫밤이 기울었다.
55p- "남해안 일대가 초토화됐더라고요." "그런데 왜 우리는 여기까지 왔을까요?" 어느새 돌아온 교사가 그렇게 물었다. "너무 가까운 건 무섭거든요. 내가 매일 덮는 이불이나 매일 쓰는 그릇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더 객관적으로 보이지 않나요?"
61p- 재난 여행을 떠남으로써 사람들이 느끼는 반응은 크게 '충격 → 동정과 연민 혹은 불편함 → 내 삶에 대한 감사 책임감과 교훈 혹은 이 상황에서도 살아남았다는 우월감'의 순으로 진행되었다. 어느 단계까지 마음이 움직이느냐는 사람마다 다르지만, 결국 이 모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재난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나는 지금 살아 있다는 확신이었다. 그러니까 재난 가까이 갔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전했다, 는 이기적인 위안 말이다.
188p-
"뇌를 촬영한 영상이 있어요. 본 적 있어요?"
"글쎄요."
"난 본 적이 있어요. 사람의 뇌가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뇌 속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요. 그걸 포착한 사진인데, 꼭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는 것 같았어요. 불빛이 켜졌다가 꺼졌다가 다시 빛났다가 꺼졌다가. 반짝반짝하거든요. "
"크리스마스트리 본 적 있어요? 여긴 더운 나라인데."
"크리스마스가 없는 곳이 어디 있겠어요."
그렇게 말하곤 럭이 혼자 웃었다.
"사실 직접 본 건, 리조트가 생기면서부터네요. 그것보다 더 많이 본 건 저 별들이죠. 그러고 보니, 뇌의 영상이 저 하늘을 닮은 것도 같아요. 검은 바탕에 흰 별들이 반짝반짝 빛나거든요."
요나는 럭을 따라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럭의 떨리는 목소리에 눈물이 고이고 말았다.
"내가 당신을 떠올릴 때, 내 머릿속에서는 그렇게 별이 빛나고 있을 거예요. 나도, 당신도, 그걸 직접 보지는 못하겠지만 분명 내 머릿속에서는 그렇게 별이 반짝이고 있을 거예요."
196p- 뒤집혀서 읽기 힘든 글자들을 바라보며, 요나는 뒤집힌 것들에 대해 생각했다. 시나리오 속의 비극적인 연인도 그렇게 뒤집힌 것 중에 하나일 수 있었다. 매니저에게 감정을 들킨 것이 내 운명을 바꿔 놓은 것인가, 매니저가 시나리오가 바뀌어도 관계없겠느냐고 묻던 말이 이런 의미였던가, 요나는 소름 돋은 팔을 쓸어내렸다. 목 뒤도 서늘해졌다. 작가는 폴이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원한다고 했다. 요나는 럭을 죽이지 말라고 부탁했다. 그렇다면, 결국 비극을 이루기 위해 선택된 사람이 나란 말인가. 결국 두 사람 중 하나는 죽이기로, 그렇게 결론이 났던 것인가. 요나는 머릿속으로 수많은 경우의 수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