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의 마음>
151p-
안녕, 오늘은 무사한 아침이야.
무사하다는 것은 무한과 무수 사이에서 간신히 건져올려진 낱말같아.
막막한 바다를 떠다니는 작은 보트처럼.
156p- 상수는 피조물의 정확한 뜻이 뭐더라 하면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존재랑 같은 거구나, 존재." "존재랑은 좀 다르죠. 있다는 것과 있게 되었다는 것의 차이가 있으니까."
163p- 그렇게 말하는 경애를 산주가 안거나 끌어당기면 분명히 따뜻해졌다. 너무 선명하고 가까이 있던, 아주 세세하고 세밀하던, 그러니까 어느 크고 순한 개의 털이나 풀잎의 잔가시들을 만질 때 느껴지는 그 작고 촘촘한 살아 있음.
176p- 언니, 폐기 안 해도 돼요. 마음을 폐기하지 마세요. 마음은 그렇게 어느 부분을 버릴 수 있게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우리는 조금 부스러지기는 했지만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언제든 강변북로를 혼자 달려 돌아올 수 있잖습니까. 건강하세요, 잘먹고요, 고기도 좋지만 가끔은 채소를, 아니 그냥 잘 지내요. 그것이 우리의 최종 매뉴얼이에요.
225p- 경애 엄마는 그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즐겨 했다. 그러면 경애는 그 순간, "원두막이 무너진 거야, 우리는 그 와중에도 그게 웃겨서 다친 줄도 모르고 웃고"라고 하는 순간을 기다렸다. '다친 줄도 모르고 웃는다'는 그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경애가 커가면서 엄마에게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이 되었다. 하지만 막상 경애가 그때의 엄마 나이가 되었을 때는 다친 줄도 모르고 웃을 수는 없었다.
240p- 경애는 그날 E의 집에서 나던 냄새, 할머니의 말투, 세 형제가 함께 쓰던 방, 처마 아래로 떨어지던 장맛비 같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식사 끝에 E의 아버지가 돌아왔고 "새 친구?" 하고 물으며 앉았다는 것도, 그리고 그리고 수제비를 다 긁어 먹으며 '구정소식지'를 펴서 읽었단 것도. 그것은 어딘가 목가적인 분위기였다. 아무도 경애에게 신경 쓰지 않았고 E마저 자기 공간에 들어선 친구를 일부러 챙겨주려 하지 않았다. 특별할 것 없이 고요했고 각자가 필요한 일들을 할 뿐이었다. 경애는ㅡ나중에 서른살이 넘어ㅡ그날 E의 집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306p- 조선생이 창식씨의 마음을 붙들기 위해 가장 먼저 집안의 먼지를 쓸고 빨래를 하게 했던 것을 떠올리며 경애는 아침이면 집에서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호찌민으로 가면서 집을 빼지 않아 다행이었다. 어디로 가든 다시 돌아올 곳이 있다는 사실은 중요했다. 아무리 바닥으로 내려가는 듯해도 최후의 낙하점은 있어야 했다. 경애는 다시는 자신을 방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번에는 고통속에 떠내려가도록 놓아두지 않겠다. 그렇게 움직일 때마다 마치 환영처럼 아주 단순한 일도 차마 하지 못해 무기력하던 어느 여름의 기억들이 먼지처럼 공중으로 떠올랐다.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에서 뭘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 언니의 응원을 받아 겨우 문밖으로 나가 옥수수나 맥주를 사들고 왔던 시절. 생각해 보면 경애가 파업 이후 회사에서 은근한 따돌림을 받으면서도 버틴 건, 버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버려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러니까 모멸 속으로.
316p- 이별이 분노나 실망감, 적의 같은 단일한 감정으로 이루어졌다면 오히려 품고 살아가기가 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군가와 헤어진다는 것은 그렇게 고정되어 있지 않고 순간순간 전혀 반대의 감정이 몸을 부풀려 마음을 채우기에 아픈 것이었다. 경애는 아프다고 생각했다. 아픈 것을 대체할 다른 말은 없었다.
318p- 그렇게 해서 고통을 공유하는 일은 이토록 조용하고 느리게 퍼져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느꼈다. 밤이 깊어지듯이 그리고 동일하게 아침이 밝아오듯이.
320p- "우리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이이니까 사랑에 대해 말하고 싶을 때만 이메일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을 때를 기다렸습니다. 요즘 저는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그걸 했던 나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합니다. 그 시간의 의미가 타인에 의해서 판결되는 것이야말로 나 자신에게 가혹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언니 님은 요즘 어렵게 지내고 계실 것이 분명하고 이메일이 버젓이 돌아다니는 저도 좋은 기분은 아닙니다만, 우리가 함께 이야기하는 일만은 폐기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32p- 어머니의 가장 환했던 때를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 확인해 보는 일은 중요하지 않은가. 기다리는 동안 상수는 어머니 하면 떠오르던 그 막막한 여름밤 대신 이 봄볕에 알맞은, 좋은 계절의 어머니가 떠올라서 좋았다.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야.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사랑에 빠지는 것이야.
341p- 창식씨는 오른편을 돌아보았는데 거기에는 조선생이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사이 창식씨의 얼굴에는 오래전 언젠가 어떤 이유로 밀쳐두거나 버려야 했던 감정들, 오직 자기 자신이 서 있는 사람만이 제대로 감지할 수 있는 그 변화하는 감정이라는 것이 나부꼈다.
344p- 오래전 E를 만나러 1호선을 타고 가다 마주친 인천의 지명들이 그 아이를 떠올리게 했던 것처럼 구로는 경애의 어떤 시절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아홉명의 오래도록 산 노인이 있는 마을, 그 이름은 공단이 있는 지금 이곳과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시간이 쌓인 것, 굽은 것, 견디는 것, 부러지지 않는 것, 제자리에 앉아 있는 것, 색이 바랜 것, 유연한 것, 아주 슬프지는 않은 것은 오후의 토근길에 나선 이들의 모습이기도 했으니까.
349p- 그렇지 않아도 늘 뭔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았으니까 상수에게는 그리 힘든 기다림도 아니었다. 경애는 세상을 떠난 사람도 아니고 19세기 브론테 자매의 소설 속 인물도 아니며 브로마이드 속에만 존재하는 히로인들도 아니었다. 경애는 지금이라도 눈을 감으면 아주 복합적인 실감으로 떠올릴 수 있는 대상이었다. 경애와 상수에게는 추억이 있고 대화가, 어긋났던 감정들의 순간과 실패의 경험과 자주 있었던 낙담과 서로를 서툴게 위로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런 것들이 적어도 상수에게는 너무 뚜렷했으므로 상수는 기다릴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여전히 댓글 속에서도 늘 기다리는 마음을 유지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이란 자기 자신을 가지런히 하는 일이라는 것, 자신을 방기하지 않는 것이 누군가를 기다려야 하는 사람의 의무라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최선을 다해 초라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352p- 상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것은 10월의 어느 깊은 가을날 우리가 떠안을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와의 이별에 관한 회상이었지만 그래도 그 밤 내내 여러번 반복된 이야기는 오래전 겨울, 미안해, 내가 좀 늦을 것 같아 눈을 먼저 보낼게,라는 경애의 목소리를 반복해서 들으며 같이 울었던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 서로가 서로를 채 인식하지 못했지만 돌아보니 어디엔가 분명히 있었던 어떤 마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좀 더 집중해서 깊이 읽지 못해 아쉬움이 남은 책이었다.